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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책이야기. 좋은글 과 시

[좋은시] 이해인 시모음

by 꽁스의 하루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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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은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슬픔 가운데도 빛나는
내 귀한 연륜

시시로
높은 산정 오르며
생각했지

눈 감으면 보이고
눈 뜨면 사라지는
나의 사랑

하 그리 고운 언어들
많이도 잊었지만
은총의 빛 얻어
슬프지 않은

가을 날
희게 손을 씻고 뛰어가는
당신의 언덕 길

덧없이 숨이 차 옴은
그게 다 어린 탓이라고
혼자 생각에

마음 더욱
가난히 키워
고개를 들면

가을 산은
내게 더 가까이 있고
더 푸르게 있다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 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새벽 창가에서

하늘
그 푸른 둘레에
조용히
집을 짓고 살자 했지

귤빛 새벽이
어둠을 헹구고
눈을 뜨는 연못가
순결은 빛이라 이르시던
당신의 목소리
바람 속에 찬데

나의 그림자만 데리고
저만치 손 흔들며
앞서가는 세월

나의 창문엔
때로 어둠이 내렸는데
화려한 꽃밭에는
비도 내렸는데

못가엔

꿈을 심고 살자 했지

백합과 촛불 들고 가는
새벽길에
기도를 뿌리면

돌을 던질 수 없는
침묵의 깊은 바다
내 마음에
태양이 뜬다

꽃들이 설레며
웃고 있는 밭 사이
창은 하늘을 마시고

내가 작아지는
당신의 길
새벽은 동그란 연못



11월에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마리아

투명한 가을 하늘
마리아를 부르면
해 뜨는 마음

가난해서 뜨거운
우리네 소망의 촛대 위에
불을 켜는 어머니

쉬임 없이 타오르는
주홍빛 불길
두 손에 가득 받아
언 마음을 녹인다

깊은 산골짜기
산나리 향기 먹고
담담히 흘러가는
물 같은 여인의 사랑

맑은 물 가슴에 차서
쓰디쓴 목마름을
씻어 없앤다

가을 꽃 피어나는
가만한 숨소리로
숨어 오는 마리아

당신의 이름 부르면
길이 열린다

거미줄로 얽힌 죄 많음을
후련히 쏟아 버린
따스한 눈물

가난한 우리네가
펄럭이는 촛불 되어
돌아오는 길

해를 안은
마리아와
영원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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