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연예/책이야기. 좋은글 과 시

[좋은시] 이해인 시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열림원

by 꽁스의 하루 2020. 11. 4.
반응형

[좋은시] 이해인 수녀님 시

이해인 수녀님 시

이해인 수녀님 시

사진 ⓒ애뽈  

 

나를 키우는 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사진 ⓒ애뽈  



바람에게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일지라도
자꾸 가라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준 그 한 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사진 ⓒ애뽈  

 


꽃 이름 외우듯이


우리 산
우리 들에 피는 꽃
꽃 이름 알아가는 기쁨으로
새해, 새날을 시작하자

회리바람꽃, 초롱꽃, 돌꽃, 벌깨덩굴꽃
큰바늘꽃, 구름체꽃, 바위솔, 모싯대
족두리풀, 오이풀, 까치수염, 솔나리

외우다 보면
웃음으로 꽃물이 드는
정든 모국어
꽃 이름 외우듯이
새봄을 시작하자
꽃 이름 외우듯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먼 데서도 날아오는 꽃향기처럼
봄바람 타고
어디든지 희망을 실어 나르는
향기가 되자


사진 ⓒ애뽈  

 


추억 일기 1


"엄마, 나야. 문 열어줘”
어느 날 해 질 녘
수녀원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고운 목소리

그 옛날
골목길에 들어서면
파란 대문 앞에서
내가 했던 그 소리

어둠 속의 그 말이
하도 정겨워서
울컥 치미는 그리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엄마를 거쳐
이젠 할머니도 되었는데

난 한평생
누구에게도 엄마 한 번 되지 못하고
철없는 아이로만 살았구나

어린 꽃에게 나무에게라도
가만히 엄마라고 불러달랄까?

감옥에서 나더러
엄마가 되어달라는 소년의 글엔
아직 답을 못하겠다

 




추억 일기 2

1
"넌 그때 왜 그랬니?
온 식구가 찾아 헤맨 끝에 보니
어느 골방에서 배시시 웃으며
걸어 나오더구나. 쬐끄만 애가 말이야"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고모님이
어느 날 불쑥 던지신 이야기 속으로
문득 걸어 나오는 다섯 살짜리 아이

조그만 크기의 라디오 하나 들고
아무도 없는 구석방에 들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원리를 캐내려고
꽤나 고민했다
작은 라디오 안에
어떻게 큰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고 있는지
하도 신기하고 경이로워서
밥도 굶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하루에도 몇 번씩
서랍을 열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내 유년의 비밀서랍
비밀도 없는데
비밀서랍을 만든 것은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인형의 옷을 해 입힐
색종이와 자투리 헝겊
미래의 꿈과 동요가 적힌
공책과 몽당연필이
가득 들어찼던
내 어린 시절의 서랍은
어둠조차 설렘으로 빛나던
보물상자였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서랍 속엔
쓸모없는 낙서와 먼지
내가 만든 근심들만
수북이 쌓여 있다

3
하루 종일
종이인형을 만들며
함께 꿈을 키우던
동그스름한 얼굴의
소꿉친구가 그리운 날

노오란 은행잎을
편지 대신
내 손에 쥐어주던
눈이 깊은 소년이
보고 싶은 날

나는 색종이 상자를 꺼내
새를 접고
꽃을 접는다

아주 작은 죄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푸른 가을날

가장 아름다운 그림 물감을
내 마음에 풀어
제목 없는 그림을
많이도 그려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