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어느 날
해 질 무렵 어느 날
꽃 지고 난 뒤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씨를 키우고
씨를 날리는 꽃나무의 빈집
쓸쓸해도 자유로운
그 고요한 웃음으로
평화로운 빈손으로
나도 모든 이에게
살뜰한 정 나누어주고
그 열매 익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만남보다
빨리 오는 이별 앞에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해 질 무렵 어느 날
애틋하게 물드는
내 가슴의 노을빛 빈집
장미를 생각하며
우울한 날은
장미 한 송이 보고 싶네
장미 앞에서
소리 내어 울면
나의 눈물에도 향기가 묻어날까
감당 못할 사랑의 기쁨으로
내내 앓고 있을 때
나의 눈을 환히 밝혀주던 장미를
잊지 못하네
내가 물 주고 가꾼 시간들이
겹겹의 무늬로 익어 있는 꽃잎들 사이로
길이 열리네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로웠던
나의 삶이
암호처럼 찍혀 있는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오늘도 내 마음에
불을 붙이네
석류의 말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등 뒤에서 하는 말
누군가 내 등 뒤에서
하는 말들이
바람 속에 날아오면
안고 싶지 않아도
일단은 안아야 하지
그 말을 키우다가
민들레 솜털처럼
적당한 시기에
다시 날려 보내며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싶네
친한 사람이
내 뒤에서 하는 말도
끝까지 모르는 척 해야지
결심은 하지만
왠지 슬퍼서
조금은 울고 싶네
꿈속의 꽃
오랜 세월
내 사랑하는 친구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친구가
어느 날 정색을 하고
다른 이의 말만 듣고
나를 마구 다그쳤지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변명도 못 하고
마음으로 끙끙 앓다
잠이 들었지
빨갛게 피 흘리는 동백꽃으로
하얗게 눈물 흘리는 매화로
그래도 사랑한다 고백하며
나는 그대로 꽃이 되고 있었지
말로 다하지 못한 나의 생각이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지
조그만 행복
바닷가에 가면
조개껍질
솔숲에 가면,
솔방울
동심을 잃지 않고 싶은 내게
평생의 노리개였지
예쁜 마음으로 주워서
예쁜 마음으로 건네면
별것 아닌 조그만 게
행복을 준다며
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나도 내내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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